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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타인의 친절, 마이클 맥컬러프 저] 친절을 알아가는 과정
    1F 책책책 2022. 1. 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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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 

     

     
    <에이지리스> 서평을 쓰면서 읽기 시작한 <타인의 친절>은 분명  '노화'와 '이타심'이라는 거리가 느껴지는 다른 영역의 주제를 다루는 책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연장선상에 있는 책처럼 느껴졌다. 두 책에서 첫눈에 잡아낼 수 있는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책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는 당신보다 똑똑하다"  - 생물학자 레슬리 오겔 (에이지리스 p.290)
     
    그렇다. 진화는 생각보다 똑똑하다. 어떤 유전자가 특정 역할(예를 들어, 암세포 사멸 유도)을 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단순히 복사본을 늘려서 예상대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에이지리스>에서 인간 및 여러 생명체의 진화는 노화와 번식, 그외 질병의 방어(예방)이 서로 타협해가면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타인의 친절>에서는 낯선이들에 대해 점차 친절해온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탐구하면서 진화론적 관점을 전해준다. 이타주의와 연민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 특유의 믿음과 욕망, 동기, 감정, 인지능력 등을 고려하면서 진화론적 접근을 하게 되는데, 진화론자들은 '낯선이들에 대한 적응'이 진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란 의견과 언젠가 다시 만나 베푼 친절을 돌려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저지르는 '축복받은 실수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라는 견해로 나뉜다. 이런 견해는 너무 단순하고, 최근 인류 역사를 고려하지 않으며, 인간의 인센티브를 추구하며 추론하는 능력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이타심'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기에 저자는 보다 종합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두 개의 책을 읽으면서 과학, 인문과 같은 소재적인 카테고리로 나눌 수는 있지만 정말 편의상의 분류이지 독서에 영역을 나눈다는 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독서는 책이란 여러 사람들이 탐구하고 연구한 결과물들을 각각의 방향으로 '나를 포함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모든게 '인간'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제목에서 왜 거부감을 느꼈을까? 

     

    1) 무주의맹시 효과 (inattentional blindness)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참 열심히 살지만, 나름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내 목표에만 집착하느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안 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때도 있다. 가족들과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왠지 내가 타인에 대한 친절을 잃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에서 느꼈다. 
     
    책에 대해 궁금해서 책 정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아마존에서 원문으로 소개를 읽어보면서 외서에는 'The kindness of Stranger (타인의 친절)'이란 제목의 책이 한 권이 아니였다.  자서전, 여행하면서 느낀 타인의 친절을 서술한 에세이도 있었다. 소설도 있었는데, 따뜻한 이타심에 대해 내용도 있었지만 반대로 타인의 '원하지 않는' 친절로 일어나는 서스펜스를 그리는 소설까지 있었다. 무려 동명의 영화까지 검색되는 걸 보면서 세상이 원래 이렇게 '타인'과 '친절'에 관심이 많았던가 싶었다. 
     
    '농구장 코트를 가로지르는 고릴라'로 대표되는 무주의맹시 상태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다.   
     

     

    2) 왜 친절해야 한다고 인식해왔을까? 

     
     
    타인에게 친절한 것이 더 옳다고 무의식 수준까지 입력되어 있기에, 친절한 행동을 하느냐와 무관하게 그래야 한다고 여겨왔다. 
    그럼 지금까지 왜 '친절함'이 더 옳은 일이라고 느껴왔던 걸까?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을지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화론은 인간이 이타주의를 발휘하게 된 이유에 '낯선 이에 대한 적응'과 '축복받은 실수'로 설명하지만, 진화가 낯선이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했다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일단, 직관적으로도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은가? 인간의 이타심을 놓고 '성선설'과 '성악설'의 입장으로 친구들과 갑론을박했던 날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약간 슬프게도 성악설의 지지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것 같다. 
     
    성선설이 옳은 거 아닌가라고 주장은 했지만, 성악설이 너무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가 많다보니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선설을 주장하는 것인지 착각이 들고 설득당할 뻔 했었다.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로도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인류 역사가 직접적으로 이타심의 발현의 측면에서 보아도 분명 그러하다. 
     

     

     

    구글앤그램뷰어로 '가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 중
     
     고아들의 시대에는 농업이 시작되면서 자산을 물려줄 수 있게 되면서 대가족의 행복에 집중하면서 이웃에는 소홀해진다. 심해진 불평등을 고대의 왕들이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연민을 권력 유지와 백성의 사랑까지 일거양득의 이익을 낸다.  
     연민의 시대는 '축의 시대'라고도 불리웠으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겪으며 정치적 격변들이 일어난다. 문맹률이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더 부유해지면서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추론에 힘이 실리고, 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나은 삶, 도덕적인 삶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 엘리트 계층이 황금률을 앞세워 세운 각종 사회 시설을 갖추고, 책임있는 행정기관과 대규모 모금활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난이 해결가능한 문제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5장 3절과 같이)
     예방의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의 급증으로 기존의 사회 제도로는 빈민구제가 어려웠고, 농업이 쇠퇴하고 국제 무역이 주요 산업이 되었다. 일자리보다 노동력이 넘쳐나 임금이 오르지 않았으면서 양산되는 가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그리고 정책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람들과 그 원인을 참찾음으로써 기본적인 수준을 지원하고, 교육과 일을 통해 가난을 벗어나자는 정책적인 진전을 이루어낸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일부 지원책들이 효과를 이뤄내지만, 자유방임주의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도시 기업가가 포함된 중산층 유권자들이 구빈법 개혁을 외치면서 신체건장한 가난한 사람이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적으로 가난을 예방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나 부자의 영적 의무가 아닌, 국가의 책임이라는 사상을 남겼다. 
     1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에는 1880년대에 이르러 빈곤선 밑으로 떨어졌던 노동자의 삶이 부유하고 윤택해졌고, 정부가 질병, 장애, 노화라는 경제적 위험에서 국민을 지키기 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과학의 힘에 대한 굳은 믿음과 분배적 정의의 개념 덕분에 가난은 도덕적 결합도 현대 경제의 필요악도 아닌, 여러 사회문제로 인한 예측 가능한 결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에 전세계가 함께 고통을 공유하게 된 것이 기반이 되어 복지 국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복지(walfare)'의 결과들로, 이런 사회안정망 확대비용은 점차 증가하여 국내 총생산(GDP)중 1900년대 1% (복지 및 교육 각각)에서 오늘날 선진국들은 약 20%를 사회복지로, 5%를 교육비로 쓰고 있다.
     인도주의 빅뱅시대에는 세계 속에서 인간 위치에 대한 낙관,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개선하는 인간 능력에의 낙관이 싹텄다. 리스본 대재앙 이후에 형성된 낙관론에 더해 통신 및 교통의 확대와 같은 문명의 고도화로 위기를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신이 내리는 벌 대신, 세계 질서 및 세계 평화에 대한 도전,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기회 등으로 말이다.  
     2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은 '가난'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면서 (구글 앤-그램뷰어) '빈곤의 문화', '근로 빈곤층', '최하층 계급', '제3세계' 라는 표현 등의 가난에 대한 사고과 확장된다. 이러한 개념화는 가난에 대해 더 명확하고 섬세하게 접근하게 해줬으며, UNICEF, OECD와 같은 국제 기구 및 자선기구가 가난한 사람들을 지웠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도록 하는 방법도 찾아냈으며, 유명인들의 마음이 다수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선한 일을 더 잘하겠다'는 인식이 생성되었고 실제로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된 셈이다.
     충격의 시대는 대규모 고통에 대한 어떤 특정한 역사적 경험에서 분류된 시대가 아니다. 유한한 자원 하의 세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결핍과 불행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도 다수인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고아들의 시대-연민의 시대-예방의 시대-1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인도주의 시대 -2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충격의 시대를 차례대로 보면서 친절해야 한다는 사고는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부분이 크다고 느꼈다. 과거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는 시대에 특히 이타심을 발휘할 계기가 형성 되었듯이 우리 나라가 발전하는 시대에 태어나서 적어도 전쟁의 공포 없이, 세계 모든 곳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환경적인 배경이 '선한 일을 해야한다'는 도덕적인 명령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본다. 지금까지 세번째 가닥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본능과 역사라는 나머지 가닥에 대해 앎으로써 더 나은 '친절'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3) 누구에게 친절할 것인가의 문제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면, 구체적으로 기부를 한다면 국내부터 특히 환경을 스스로 바꿀 수 없고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는 어린 아이들이나 그런 아이들을 돌보는 한부모 가정, 조부모 양육 가정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2차 가난 계몽주의 시대부터 아이들이 겪는 가난에 대해서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절대적이었다. 그런 감정을 활용한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캠페인이 정기적 후원 모델을 만든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남편은 꽤나 친절한 사람인 것 같지만, 유독 노인들과 노숙자에게 기부하고 싶어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먼 미래는 나의 미래로 인식을 못하니 노인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캠페인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다. ) 그래서 작은 금액이나마 일년에 한번 정도씩 기부금을 내게 되면 어디에 기부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할 때 제한된 자원을 '누구'에게 친절하게 쓸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간혹 해외 선교나 해외 봉사를 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봉사라고 느꼈다. 단지, 의사나 간호사와 같이 그들의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숭고한 마음에 감동까지 느꼈지만, 구체적인 역할 설정이 없어보일 때에는 (물론 일손 자체가 필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들이 가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실천해보지 않고 들어보기만 한 내용으로 생각한 부분이니 이런 무지한 생각에 누군가 얹짢은 기분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선행을 아름다운 마음으로 행함에 있어, 더 가까운 곳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저비용으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거의 마지막인 '충격의 시대' 장을 읽으면서 유한한 자원과 더욱 커지는 불평등과 격차 속에서 나 또한 과학 및 연구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최대한 많은 선에 집착해왔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5가지 유형의 기부자 중에 '효율성 전문가'와 가장 유사하고 사고했던 것 같다. UN이 지속가능발전목표 168가지 전부 투자해서 (경의로운 개발 목표 중에서 투자하는 것보다) 정작 미미한 효과를 냈다는 것을 고려하면, 효율보다는 기부할 수 있는 파이 크기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과 같은 자선 자본주의가들의 '벤처 자선활동'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만큼 효율 못지 않게 그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자본이 있다면 극복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 주변부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기를 

     
     
     제목을 확인하고 어색하고 다소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건, 친절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막상 그 주제의 가치에 대한 입장이 정리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또 메타인지가 낮았던 셈이다. 딱히 불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타심이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가까운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면 좋겠고, 많은 사람이 독서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릇' 그 정도 일 뿐인 것 같아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왜 우리가 친절하려고 해야 할지, 누구에게 더 친절해야할지도 고민해보면서 여전히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머리만 갸웃거릴 게 아니고 가까운 곳부터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실천을 해보는 게 우선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른 씽커들이 이 책이 어려운데 완독하고 마음이 웅장해진다는 표현에 공감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공감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더욱 완독하고 서평을 쓰려고 집착했던 듯 하다. 이기적이지만 점차 선함을 나누고 있는 인간임에 감사하고, 또 그 이타심에 일조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겠다. 
     
     
     
    여담) 2021년 마지막으로 완독하는 책 
     
    환경설정) 
    새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자책으로만 읽어낼 수 있을지 테스트 중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지만, 밑줄긋기와 검색이 되는 기능, TTS를 잘 활용하면 효율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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