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내심을 약하다-강하다를 0-100으로 놓는다면 난 어디쯤 서 있을까? 스스로 나에게 40점 정도를 줄 것 같다. 아주 많은 다수에 속할 것이고, 또 조금은 약한 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평이할 것 같은 한 사람의 입장에서 <최악을 극복하는 힘>을 읽은 경험을 써본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여러 방면에서 한번에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이가 아팠고, 일에서는 성과로 압박 받고 한편 팀워크에도 문제가 생겼다. 직장에서 가까운 동료들도 제각각 마음 속 비명을 지르고 있어 대화라기 보다는 아우성치고 있다. 지금의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을 때 귀가하면서 대화소재로서 일이 들어오더라도 감정은 남기지 말고 귀가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확실히 누적이 되니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모든 것보다 문제였던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스위치가 눌린 것 같았다. 매일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며 지키던 루틴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이번 달에 해보겠다 했던 것이 뭐였는지 한 순간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심란한 마음에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은 무려 앨리자베스 스탠리의 <최악을 극복하는 힘>이었다.
트라우마의 고착
아마 객관적으로도 성장환경이나 생활수준은 0-100 사이에 아마 50 이상에서 살아왔을 것 같다. 고리타분한 자기소개서에 흔히 쓰였던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온 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쳐야 할 수준은 전혀 아니고 평범하게 지내왔는데, 이상하게도 난 유복함을 즐기지 못하고, 힘들다고 잘 안된다고 말하는 걸 어려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가족들이 명문대를 나오고 화려한 이력이 있고 이런 부담스런 환경에 처한 것도 아니였다. 무슨 이유로 이런 사고가 자리 잡았는지 여지껏 모르는 부분이지만, 무언가 잘 안 되었을 때 필요 이상의 자책을 하고 있었다.
저자 엘리자베스 스탠리가 말하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연속성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취약한 포지션을 취해온 셈이다. 저자는 군인 가정에 태어나 높은 스트레스 정도가 아닌 폭력에 노출된 환경에 있었고 미 육군 정보장교로 일하면서 겪은 부조리함과 장기 파병 스트레스로 결국 퇴역하였다. 괴로운 다수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회복탄력성 훈련 프로그램인 MMFT (Mindfulness-based Mind Fitness Training)를 만들었다. 유해하고 배타적인 조직에서 겪었던 폭력과 트라우마에도 다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더 잘 조절하도록 도우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18장)와 방대한 분야에서의 지식에 감탄스러웠다. 근래 접한 뇌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복습하게 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까지 고민을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니 키보드에 구토를 하게 되나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목차 & 인용 (앞부분 일부만) -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
-1부 다람쥐 쳇바퀴 위의 삶- 1장 디지털 세계의 석기시대 생리학 본래 인내의 창이 넓었던 사람들도 만성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회복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인내의 창이 좁아진다. 심신 체계를 잠시도 쉬지 않고 '항시 가동' 상태로 운용하면 회복 탄력성이 점차 약해지기 마련이다.
2장 우리는 어떻게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연속성을 무시하는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하면 신경 생물학적 기반이 같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 그의 생존되가 신경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그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 (62쪽) 상태가 좋아진다고 느끼고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속에서도 잘 살아가며 효과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길은 자기 계발보다는 자기 이해에 있다. (86쪽)
-2부 인내의 창을 둘러싼 과학- 3장 심신 체계의 그랜드캐니언-신경가소성과 후생유전학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는 이렇게 요약된다. 어떤 경험이라도 반복되면 미래에 그것을 다시 하기 가 쉬워지고 다시 하지 않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가 그토록 어렵고 새로운 습관이 정착됐다고 느낄 때까지 몇 주간 의도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것 (94쪽) 인간은 자발적 신체 운동을 통해서도 신경가소성적 효과를 경험한다. '노년층 대상 연구' 결과 (96쪽) 다행히 최근 연구는 특정 유전자를 '보유하면' 반드시 특정한 행동이나 질병이 나타나게 된다는 오랜 믿음을 완전히 해체했다. ... 더욱 중요한 사실을 유전자의 발현 여부, 즉 유전자의 '활성화' 여부가 우리의 반복 경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04쪽) 과거가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오늘의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112쪽)
4장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겪는 동안의 신체 인간의 방어체계: 신경계가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 (128쪽~) 인간의 3단계 방어 체계는 진화해왔고 ... 이상적으로 우리는 가장 최근에 발달한 방어 전략인 사회참여 체계 (social engagement system)에 먼저 의존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 ... 만약 이 전략으로 안전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생존뇌와 신경계는 진화적으로 더 오래된 두 가지 방어 전략으로 '후퇴한다'. 두번째 방어 전략은 투쟁-도피 반으응로 앞의 사례에서도 공격자에게서 도망가려는 시도가 포함됐다. 마지막은... 동결 (freeze) 반응이다. (131-132쪽)
5장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겪는 동안의 뇌
생존 뇌는 완전한 회복을 경험할 때까지 디폴트 프로그래밍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생존 뇌는 완전한 회복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그 충격적 사건이 과거에 끝났고 현재는 심신 체계가 안전하다는 현실을 인식할 것이다.
-3부 인내의 창을 넓혀라- 11장 전사의 전통 12장 사고 뇌와 생존 뇌의 동맹 13장 회복을 통해 회복탄력성 기르기: 미시적 수준의 주체성 1 14장 스트레스, 감정, 만성 통증에 따른 선택에 접근하기: 미시적 수준의 주체성 2 15장 한계와 저항을 능숙하게 다루기: 거시적 수준의 주체성 1 16장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 번영하기: 거시적 수준의 주체성 2 17장 인내의 창을 넓히는 습관 선택하기: 주체성을 기르는 구조적 조건 18장 집단적 인내의 창 넓히기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결국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 자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특히 나의 경우는, 성장할 수 있다면 결국 해결될 종류의 문제이기에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더욱 나를 강하게 만든다. '라는 문장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최악이었던 그 때 이 문장을 접했다면 받아들을 수 있었을까? 끔찍한 말이라며 기억에 담지도 않았을 것 같다.
실패와 자괴감의 늪에 빠져 있었을 때도 특별히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외상성의 스트레스나 큰 사고를 겪지도 않았고 일단 우울증을 진단받아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긴 기간동안 프래질하게 사고해왔고, 그 때문에 생존 뇌는 계속 위협 받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런 게 우울증인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정확한 마음 상태를 파악하고 싶다기보다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누구와 나눌 수도 없었고, 도움을 잘 구하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또다시 괴롭혔다.어림잡아도 서너번의 늪에 빠졌던 것 같다. 결과는 현실 도피를 불러왔고, 또는 결국 급성/만성 질환으로 몸에 나타났다. (지인 표현에 따르면) 세상 건강할 줄 알았던 나는 갑자기 그렇게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매번 애매하게,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심신 체계는 아이를 낳고 혼자 생각할 고독에 처한 뒤에야 제대로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주변에 보면 임신 전부터 산후 우울증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출산 직후의 1~2년 정도 사이의 우울한 감정은 분명 극복하기 어렵지만 나처럼 인내의 창을 회복하기도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히려 나의 과거-현재-미래에 오롯이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그동안 피하고 싶었던 오랜 문제들이 한 번에 떠올라서 힘들 수 있지만, 다 알고 있던 것들이라고 말이다.
트라우마 버튼이 다시 눌렸을 때
마음을 다 잡고서는 독서를 하고 산후 다이어트를 하며 건강한 습관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그나마 꽤 긴 기간 동안 인내의 창에 머물게 해주었다. 가을바람만 불어오면 '올해도 한 게 하나도 없어'라고 느끼던 패배감이 없었다.
그런데도 밸런스가 무너지던 순간 '난 못할 것 같아. 어떻게 하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순간 없어졌기를 바랬던 버튼이 다시 눌렸다.
열심히 한다고 함에도 조금 구석에 숨어있던 불안감이 단번에 올라왔다.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한 켠을 차지한 만성 질환도 더 극성인 느낌이었다. (끔찍하게도 나 뿐만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을 겪는 것 같다.)
인내의 창 넓히기: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단순한 진리
개인적인 인내의 창을 넓히기 위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성찰과 자각 연습, 건강한 식단, 충분한 수면, 적절량의 운동, 지지적 관계'를 제시한다. 정말 이 책을 읽지 않고 뉴스 기사로 봤다면 별거 없다 할 그런 내용이다.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서 새롭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현대인들이 그만큼 상식적인 것들도 많이 잃고 살아가기에 점점 심신 체계가 위기에 처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자기 조절에 위태로웠던 때에도 운동에 대한 인지는 있어서 오히려 운동은 그때 여러 종류를 거치며 잘 맞는 운동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많이 했었다. 반면에 나머지는 좋은 습관이 없었던 것 같다. '성찰과 자각 연습'은 이 책에서 특히 많이 배운 부분이다. 평소 글도 쓰지 않다가 우울감에 빠졌을 때 일기 쓰면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라는 조언에 써내려가다가 더 감정을 소진했었다. '마음챙김'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적절한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대중들에게도 마음을 돌보는 연습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 때는 밀가루, 우유, 맵고 자극적인 음식, 가공식품 등이 식사에 가득 했다. 술을 특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탄산 음료에는 스스로도 중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주변과 특별히 트러블 있는 관계는 없었지만 내 부족함을 터놓고 조언을 구하지는 못했고, 그런 모습이 점점 방어적으로 누적이 되어 갈 수록 고집 센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고집이 세다는 말은 듣고 있으니 내 의견을 잘 풀어내고 타인의 의견에 선입견을 갖지 않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이 때 가장 못했던 것이 수면인 것 같다. <숙면의 모든 것>, <잠의 사생활> 과 같은 책에서도 보지만 잠을 못 자고서 가뜩이나 모자르다고 생각하는 능력치가 100% 발휘될 거라고 생각했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 때는 산재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스트레스로 뜬 눈을 지샜지만, 실제 해결에 가까워지는 것 없이 작심1일에 그치는 것들이 많았다. 드문드문이지만 저자의 경험담을 고백해줄 때 내용이 더 와 닿을 수 밖에 없었는데, TV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본인에게 TV 시청이 고갈되었을 때 물러날 수 있게 해줬고, 더 참고 견디며 밀어부친 뒤에 보상으로서 작용했고, 회피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안이었다고 한다. 나 또한 TV에 볼만한 채널이 없는 데도 무력감과 무기력으로 '내일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려면 자야하는 최소 시간'까지 버티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저자는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라고 말해준다. 변화하는 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도 한다. 같은 맥락인데 아래 문장에서야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연민을 지닌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고 다시 시작하기도 더 잘한다' 미련하게도 그게 더 '잘' 일어나는 방법이라니, 자기 연민을 아낌 없이 느끼며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난 성과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나.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찰나에 스트레스 활성화가 갑작스럽게 급격히 몰아쳤고, 덕분에 해일이 휩쓸고 간 것처럼 황폐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트라우마 버튼이 눌린 것은 내 인내의 창의 넓이가 얼만큼 견딜 수 있는지 잘 모르면서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운동-식단 습관부터 '이 정도는 다른 일이 급하니 어쩔 수 없지'라는 핑계로 조금씩 흔들릴 때 일에서의 압박 한 방을 크게 맞고 다시 쿵 떨어지게 된 것이 분명하다.
유일하게 책 읽고 (스트레스로 내용이 부실해졌지만) 플래너를 쓰는 루틴을 유지를 했고, 며칠 내내 8시간 이상의 수면으로 잠만 자고 (나무늘보가 된 느낌이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평균 7시간 수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휴식을 줄여서 성취하고 싶은 잘못된 욕구가 있다!!) 일터로 나가는 느낌이라 특히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지만 <최악을 극복하는 힘>을 천천히라도 읽고 있었기에 며칠 단위 만에 인내의 창 안으로 재빨리 돌아온 것 같다. 책을 읽고나서 서평이라기 보다 '토해낸' 느낌이 강하지만, 오늘의 선택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음을 각인시키니 몇 주 전과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만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라, <마음챙김>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 이런 책은 재독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