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부럽다고 느끼면서 잠시 책을 뒤집어두고, 처음 찾은 카페의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색다른 하루를 만나고 싶어 주문한 산미 있는 원두가 한결 상큼하게 느껴졌다.
"... 아니, 맞춤법은 확인하고 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전 무조건 받으면 맞춤법 검사한다니까요! "
감각을 높여서 책을 읽어보고자 찾은 새로운 장소에서 들린 것은 마치 동료와 작년 즈음 나눴을 법한 소재에 목소리 높낮이마저 익숙한 대화였다. 그 일행들보다 나와 가까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보다 더 귀에 쏘옥 들리는 듯했다.
전체가 들리지는 않아도 익숙한 맥락의 대화였다. 마치 MZ 세대와 기업 문화를 다루는 기사를 대화문으로 옮긴 듯했다. 제삼자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런 세대 차이가 특정 세대의 탓만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MZ란 이름으로 퉁쳐지고 있는 이들은 왜 글에 약하다는 평을 듣게 된 걸까. 개인적으로도, 꼼꼼히 잘 처리해오는 이들조차 글보다는 대화가 오갔던 걸 기반으로 하는 듯한 묘한 인상을 받기는 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겠지만...)
'세대 차이(世代差異)'는 서로 다른 세대들 사이에 있는 감정이나 가치관의 차이를 일컫는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생각'이 다르다는 건데, 정의에 따라 감정이나 가치관이라고 나누어 보니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단순히 나이와 인생의 다른 시점에 있다는 것 말고, '다른 감정'을 갖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 <센세이셔널>을 읽으면서 동일한 지구를 세대마다 다르게 보고 듣고 느낀다면 세대 차이는 사실 '감각 차이' 아닐까?
<센세이셔널>은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들을 아주 비일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표지에도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실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라는 엄청난 추천사가 적혀 있는데,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 고르기처럼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주는 책들 중 한 권이다.
일상에서 아주 우세한 영역을 맡고 있는 시각을 다루는 1장부터, 제목처럼 '센세이셔널' 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로는 배워서 빨간색이란 650 nm 파장의 가시광선을 반사하는 어떤 것일 뿐이고 뇌가 빨간색이라고 읽어주는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이나, 체열 측정 이미지 등을 접하지 않았다면 마음 한편에 의심을 떨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적외선은 '열'과 동치로 놓고 생각하니 사람에게 없는 감각이지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편광을 본다는 갯가재(mantis shirimp, mantis가 사마귀인 걸 생각하면 용이 조상이었을까라는 저자의 표현이 납득이 된다.)는 너무 놀라웠다. 1차원인 선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듯이, 흑백-컬러에 확장하여 편광이란 높은 수준의 시각을 가진 동물이 있다니... 신비한 자연의 세계다.
편광이란 표현은 교과서와 합성물의 광학 활성 측정할 때 밖에 쓸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접하게 될 줄 몰랐다. 편광을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서 설정하듯이 머리 위로 그 사람의 특성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 될 것 같다. 갯가재 입장이라면, 피해야 할 적도 사냥해야 할 먹잇감도 한 번 보고 나면 다음부터 같은 종을 발견하고 구분하는 게 훨씬 쉬웠을 것이다. 편광을 볼 수 있다니 엄청 각박한 약광층에 사는 건가 생각했는데, 열대 아열대에서 서식한다는 게 의외였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의 추정대로 개체 간 소통이 꽤나 발달한 해양생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조)
편광되지 않은 빛 = 그냥 빛이라 생각하면 되고, 편광기를 거쳐 편광만 걸러낸다. '광학활성'을 띤 물질을 거치면, 시료의 특성에 따라 특정 각만큼 회전하게 된다. 그 각도값을 가지고 물질을 구별하거나 순도를 검증하기 위해 광학활성을 측정한다. 광학활성이라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지만, 많이 아는 아미노산도 광학활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 상에 존재하는 아미노산은 L형이고, 합성하여 D형을 만들기도 한다. 두 가지는 같은 물질이므로 편광을 통해 측정하면 서로 같은 크기의 각도값을 보이나, 회전 방향이 서로 반대로 나타난다.
갯가재가 편광을 본다는 건 복잡한 기계가 없이도 아미노산 D,L형도 그냥 보기만 하면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편광의 예시처럼 종에 따라서 같은 지구상에서도 보는 것이 다르거나 느끼는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같은 종이더라도 감각에 편차가 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순간적으로 '알쓸별잡'의 대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천문학자인 심채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MZ의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기성세대들이 MZ세대가 쓰는 언어에 대한 문해력도 낮은 상황이다. "
주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평가하듯이 문해력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 측면을 언급해 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더욱 세대 간의 언어 감각이 세대 차이를 일으키고,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질수록 세대 간 갈등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나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아이를 키우다 보니 감사하게도 있는 그대로의 세대 간 경험에서 오는 차이를 느끼고 인식할 기회가 많다. 전화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어릴 적에는 다이얼을 누르는 전화기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선이 없이 각자 통화가 가능한 휴대폰이란 것들이 또래 사이에도 번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전화 = 귀를 사용하는 기기'였다. 그렇지만, 요즘 세대들은 시각과 귀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다. 사진, 영상으로 통화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세대라는 것이다. 처음 글씨를 익히기 위해 연필은 잡지만, 엄마 아빠처럼 샤프 같은 걸 과연 쓸까? 그보다는 태블릿에 쓸 터치펜이 필요할 것 같다.
최근에는 기성세대의 쇼츠나 릴스의 이용도 또한 높은데, 똑같이 적응하면 동일하게 느낄 거란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한국인들은 여전히 빠름의 민족이다. 기성세대라 해도 60대까지도 모바일 환경에 익숙하다. 하지만, 시청각 및 언어 감각이 몇 년 사이에 변하기란 쉬운 것은 아니다. MZ, 잘파라고 불리는 디지털-네이티브이 새로운 감각들의 원어민이고, 상대적으로 기성세대는 외국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과도하게~ 벌에 물린 듯한 입술에 거대한 머리와 거대한 한 쌍의 손을 가진 대뇌겉질 호문쿨루스(cortical humanculus)은 직관적으로 대뇌겉질을 이해하기에 좋지만... 솔직히 좀 징그럽다. 그런데 이 호문쿨루스를 세대 간 비교해서 그린다면 혹시 시각, 시각x청각에 대한 부분이 훨씬 비대해지지 않았을지 너무 궁금하다.
작년 여름 휴식기를 가지게 되면서 동네 산책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사도 멀리한 적이 없어 너무 잘 알던 곳이라 여겼는데, 아주 새로웠다. 더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걷다가 '가을이 이렇게 화려한 계절이구나. '를 느꼈다. 두텁게 마른 낙엽이 버석거리면서도 밟으면 향이 나도, 후두두 떨어지는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모습들이 처음 보는 것 같은 감정이 들었다.
어제는 햇빛 아래에서 땀을 닦으려고 안경을 벗었다가 하늘이 너무 파랗고 햇빛이 하얗게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블루 라이트 차단 렌즈를 끼웠지만, 의식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형광등 아래에서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실 난 눈에는 누런 필터를 끼고 오히려 핸드폰 카메라가 화사한 필터로 더 생생한 하늘을 찍어낸 건 줄 알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햇빛, 낙엽, 하늘, 핸드폰까지도.
단지 느끼는 사람의 감정이 변했고, 감각을 오해한 뇌가 있었다. 이전에도 놓여있는 수많은 자극에 대해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매 세대마다 서로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것은 결국 서로 다른 '환경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종마다 가지는 고유하고, 독특하고 주관적인 감각 세계를 묘사하는 환경세계(umwelt)*가 있다. 이 용어를 정의한 폰 윅스킬은 다른 종 간의 개념을 설명하려 했지만, <센세이셔널>의 저자 애슐리 워드는 같은 종 안에서도 나타나는 차이도 짚어낸다. 결국 우리 모두 각자의 '환경 세계' 속에 산다는 것,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처럼 모든 사람 각각의 세계를 따로, 그러나 서로 중첩된 채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킬이 제시한 용어. (388-389.)
사실, MZ 세대의 특징이 혹시 점차 더 강화되는 시각과 다른 감각을 함께 느끼는 공감각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점차 변화가 누적되어, 적어도 잘파세대에서는 그런 능력을 타고나도록 발현되는 것 아닐지 궁금해졌다. 최근 콘서트를 위한 조향을 따로 하는 가수들의 이야기도 접하면서 점차 더 많은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용체가 진화할 것 같단 상상을 했다. 각각 하나씩 느꼈던 감각을 합친 것 이상의 새로운 공감각으로 느끼는 새로운 인류는 아닐까, 지금의 세대 차이는 더 큰 변화의 시작일 뿐 아닐까 상상해 본다.
몸의 여러 기관에서 모아 뇌가 내놓은 최선의 추측인 '감각'은 결국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는 느끼는 감각만큼, 감정도 가치관도 다를 수 있지만 서로의 감각을 인지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후천적 장애를 입거나 너무 시끄러워서 소리 대신 입모양을 보고 대화하는 상황에서 봤듯이 하나의 감각이 제 기능을 못 하면 다른 감각을 활용해서 경험을 구성해낸다. 전화를 귀에 대지 않고 스피커폰으로 켜줘야 통화하는 아이를 보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뇌의 가소성을 십분 활용하여 소통해나가야 한다.
공들여 <센세이셔널> 대미를 읽을 장소로 새로운 곳을 정한 것도 책이 주는 묘미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늘 고소한 원두를 고르던 익숙하고 안전한 선택을 포기하고, 새롭게 선택해 본 산미 있는 원두가 상큼하다고 느껴지는 것으로 감각을 향한 작은 탐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p.s.: 이 글은 보다 좋은 가독성을 위하여 맞춤법 검사를 거쳤다.
'눈 고문이 취미인 우리의 친구 토마스영' (p 50) 같은 짧은 유머가 섞인 책이어서 더 좋았다.